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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14장 -17장
한사랑 2008.09.28 조회 :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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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4:1-12  

홍해 횡단-출애굽기 14-15장-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예증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구원을 받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여행 중에 겪게 되는 이스라엘의 경험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투쟁과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있기를 원했으며 가나안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상징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을 주장하는 생활이다(엡 1:3).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유대인들처럼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나 광야의 불신앙 가운데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렇다. 그들이 피로 구원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그들의 부유한 영적인 유업을 주장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장들에서 네 가지 다른 경험들을 살펴본다.


1. 두려움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14:1-12)


하나님은 홍해 근처에 야영하도록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장소를 지시하셨다. 그는 또 모세에게 애굽인들이 추적해 올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것임을 그의 말씀에 설명해 놓으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하는지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이를 기뻐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여 다시 노예로 삼으려 한다. 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적이 오고 있음을 경고해 주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하였다. 그들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보자 낙담하여 자포자기하였으며, 두려움으로 부르짖었다.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 속에 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두려워할 것은 없다. 흔히 있는 경우지만 그들은 기도하고 피차에 격려하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를 비판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었는데,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애굽을 돌아다 보고 “바로의 노예로 있는 편이 더 나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여 치시고 큰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으나, 그가 그들을 내내 보고 계심을 믿지는 않았다. 의심할 바 없이 같이 간 혼합된 군중은(12:38) 이 불평의 합창을 지휘했을 것인데 저들은 후에도 이렇게 했다(민 11:4). 이 “혼합된 군중“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개심치 않은 세상적인 사람들을 나타낸다."



출 14:13-31 

2. 믿음으로 행하는 이스라엘(14:13-31)


모세는 승리의 길이 여호와께 대한 신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히 11:29). 그의 세 가지 명령에 유의하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전진하기“ 앞서 조용히 서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15절).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지 않으면 믿음으로 걸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들었고,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군대 사이에 임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셨다(19-20). 주께서 일하시는 것은 세상에는 어두움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빛이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군대가 접근치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시켰다. 다음으로는 강한 바람을 보내어 길을 여셨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유대인들이 두려워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들을 놀라게 했던 바로 그 바람이 그들을 구원하는 도구였다. 모든 백성이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걸어서 건넜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던 바로 그 바다가 애굽에게는 정죄(定罪)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물로 애굽인들을 익사케 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영원히 분리시키셨다. 바로는 그가 뿌린 씨를 거두었다. 그는 유대인의 남자 아이들을 익사시켰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군대가 익사를 당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영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전 10:1-2). 홍해의 횡단은 부활을 통하여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모형이다. 이스라엘은 물을 통과함으로써 “모세에게, 또는 모세와 함께 세례(침례)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애굽)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애굽인들은 바다를 통과할 수 없었는데, 이는 피로써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월절과 홍해 횡단을 대조하면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월절                                   홍해횡단

어린양의 죽음-갈보리          그리스도의 부활

죄의 형벌에서 구원됨          죄의 권세에서 구원됨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대속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하나됨

로마서 3-4장                  로마서 6-8장

구원-죽음을 두려워할 필요없음  성화-적을 극복함


여호수아 3-4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요단강 횡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영적인 유업으로 들어가는 신자를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다. 각 경우를 볼 때 그리스도인이 승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행할 때이다."

출 15:1-23. 승리를 찬양하는 이스라엘(15:1-21)


이것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노래이며, 속박으로부터 구속된 후에 불리워졌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노래 부를 권리가 있다(시 40:1-3). 출애굽기는 탄식으로 시작되었으나(2:23) 어린 양으로 인해 노래하는 민족을 보게 된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높이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 18구절가운데 적어도 45회나 여호와를 말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의 인격과 거룩한 성품, 그의 놀라운 권능의 일들을 높이는 대신 인간을 높이는 노래들이 너무도 많다.

2절에 나타난 후렴을 유의해서 보자. 에스라의 지도 아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에도 시편 118편 4절에 이 후렴구가 반복된다. 이사야 1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실 미래의 그 날을 가리키며 이 후렴구가 반복된다(사 11:15-16). 선지자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때, 제사장 에스라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구원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서 구원받을 때,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때 그 노래를 부를 것이다.


이 노래를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1-10절)과 인도하심(11-13절)과 승리(14-17절)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점이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를 내다보고 그 영광을 주목하는 것으로 끝난다(18절). 미리암은 여성 합창대를 지휘하였다(남성을 지휘한 것은 아님-고전 14:34/딤전 2:11-12). 물론 여성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베풀어진 구속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출 15:22-27 

4. 불신앙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15:22-27)


해변에 남아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겠지만 신자는 순례자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야 함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마음을 깨닫도록 하셔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를 만족시킬 수있는 물은 세상에 없다. 유대인들이 물을 보자 그것이 쓴 물임을 알았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사악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찬양하나, 다음 순간 쓴 물을 보자마자 불평을 터트린다. 이 경험은 이스라엘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생활에 관하여-삶이란 쓴 것과 단 것, 그리고 승리와 시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의 가는 길에 무엇이 오든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시련이 끝날 때마다 반드시 영적인 “엘림“(Elim: 27절)이 있어서 그곳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단 물과 함께 쓴 물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고 계심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자신들에 대하여-생이란 하나의 큰 실험실이다. 매 경험들이 우리 마음을 X-선 촬영을 하여 우리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마라의 물은 유대인들이 세상적이며 육체의 만족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임을 드러냈다. 그들은 보이는 것으로 행하고 세상으로 만족을 얻고자 했다.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 시련이 오자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주님에 관하여-하나님이 길을 계획하셨으므로 필요한 것도 아신다. 하나님은 나무(십자가-벧전 2:24)를 사용하셔서 쓴 물을 달게 만드실 수 있으시다. 그는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곧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시다! 우리는 생의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를 신뢰할 수 있다."



출 16 

하늘로부터 내린 떡-출애굽기 16장-


이 장은 요한복음 6장과 연관지어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공급받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예증하는 것이기도하다.


1. 만나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한다


“만나“(manna)라는 이름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이다(15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것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쓰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 만나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자.


작다(14절)-그의 겸손을 말한다. 그는 젖먹이와 종이 되었다.


둥글다(14절)-그의 영원하심을 뜻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8:53-59).


희다(31절)-그의 순전성과 무죄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달다(31절)-그의 성품을 뜻한다.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보고 알라!“ 그러나 민수기 11장 4-8절을 보면 유대인과 함께 온 신자 중에서 “혼합된 군중“은 만나의 진가를 알지 못하였다. 세상적인 군중은 애굽의 부추, 양파, 마늘을 원했다. 그들은 단순한 만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나를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여 떡을 만들었다“. 그러자 만나는 꿀맛이 아니고 “기름“ 맛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개량하려 해서는 안된다.


만족케 한다-이 민족이 거기서 38년 동안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떡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양육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2. 만나는 예수께서 오신 방법을 예시한다


하늘에서-만나는 애굽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만든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죄인들에게 주는 아버지(하나님)의 선물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요 6:33).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밤에-만나는 밤에 내리는데 이는 이 세상이 죄로 어두움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도 밤이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이 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를 거절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밤이다(고후 4:1-4).


이슬 위에(13절)-이것은 성령의 모형이다(민 11:9).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눅 1:34-35).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나지 않으셨다면 그는 결코 “거룩한 자“로 불리워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슬은 만나가 땅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광야에-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놀라운 곳이겠으나, 영광을 향해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광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웬 은혜인가 !


반역하는 백성에게(1-3절)-이스라엘은 얼마나 잘 잊곤 하는가!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6주 밖에 안되었는데 하나님의 여러 기적들을 벌써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하였으며(15:22-27), 옛 생활의 육적인 음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에게 떡을 공급하셨다. 4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다. “감사치 않는 죄인들에게 불과 유황의 비를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떡의 비를 내리셔서 그들을 향하신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6-8 참조). 2백만 명에게 6파인츠(한 오멜)씩 공급하려면 60대의 자동차분량을 싣는 화물열차 네 대분이 매일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하신가 !


그들이 있는 곳에-만나는 유대인들이 거두어 들이기 쉬운 곳에 있었다. 산을 오르거나 시내를 건너야 할 필요는 없었다. 만나는 그들이 있는 곳에 내렸다(롬 10:6-8).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에게 올 수 있다.


3.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필요를 느껴야 한다-그리스도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영적인 배고픔이 내면에 있다(요 6:35).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내가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했을 때였다(눅 15:17-18). 오늘날 세상의 불안과 죄는 대개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는 몸을 구부려야 한다-만나는 식탁 위에나 나무에 내리지 않았다. 만나는 땅에 내렸으며 그것을 집으려면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스스로 겸손하지 못한 죄인들이 많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한다. 교만은 아마도 다른 어떤 죄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지옥으로 보내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사람은 만나를 바라보거나, 찬양하거나,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보고 있어서는 배부르지 못하다. 스스로 그것을 먹어야만 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내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요한복음 6장 51-58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의 살과 피를 의미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요한복음 6장 68절은 그가 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HIS WORD)이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을 때, 살아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일찍 그 일을 해야 한다(21절)-“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이 말은 이사야 55장 6절에 나오는 경고이다. 만나는 태양으로 인해 뜨거워지면 사라졌으며 이것은 심판의 날이 이르면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기에 때가 늦음을 암시하고 있다(말 4장). 만일 만나를 줍지 않으면 만나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물론 한 번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요 10:27-29). 그러나 우리의 순례여행에 대비하여 힘을 얻으려면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먹었던 것처럼(출 12:1-) 그리스도로 양식을 삼는 일이 중요하다. 신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가? 그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일찍 일어나 말씀으로부터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귀중한 만나를 모으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저장해 두어서는 안된다(16-21절).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에 신선한 음식을 모아와야 한다. 성경에 표시를 하고 노트에 요약하지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저장된 만나“는 벌레가 생겨 그들에게 양분이 되기는커녕 독이 된다.

그리스도이신 영적 만나는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내렸던 육적인 만나보다도 더많은 것을 성취함에 유의하자. 구약의 만나는 육체의 생명을 지탱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구약의 만나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게 자신을 제공하신다(요 6:51). 이스라엘을 위해 만나를 확보하는 데 모세는 아무 값을 치루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세상이 자신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함으로 살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대신 그리스도 위를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만나를 모으는 것은 이스라엘의 순종여부를 보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고(4절) 아직도 그는 자기 백성을 시험하신다. 성경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여 영적인 음식을 모으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슬픈 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육적인 식성으로 굶주려 있다는 사실이다(3절). 목회자나 주일학교 교사에게 대신 만나를 모아다가 수저로 떠 먹여 달라는 사람도 많다. 우리가 영적으로 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나의 날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생각하는가 ?“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여호수아 5장 10-12절은 유대인들이 길갈에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만나가 그쳤으며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만나는 위에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기형을 말하고 있다. 곡식은 장사되는 곳, 죽음의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자랐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의 유업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엡 1:3). 천국의 유업에 참여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의 제사장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는 축복들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사역을 중시하여 “육신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고“(고후 5:16)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천국의 제사장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제사장 직에 참여할 때 그들은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게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출 17:1-7    

광야에서의 문제들-출애굽기 17-18장-


이스라엘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에 여러 다른 경험들과 시련들에 봉착하게 되며, 이런 체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것과 아울러 자신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 장들에서는 세 가지 이러한 경험들이 나온다.


1. 바위에서 솟는 물(17:1-7)


이 회중은 전에도 목이 말랐었는데(15:22)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은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에 있다면 결국 그들을 돌볼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12절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바, 백성은 모세를 비난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태도로써 사실상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며 돕지도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평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의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님께 돌이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약 1:5). 주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모세에게 지시했으며 물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다. 이 바위는 그리스도이신데(고전 10:4 참조), 바위를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의 지팡이를 느끼셨다(이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였고-출 4:3 ,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 지팡이인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는 일의 순서가 놀랍다. 16장에서는 만나가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심을 나타내며, 17장에서는 바위를 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나타낸다. 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에 주신 성령을 상징한다(요 7:37-38).


바위와 관계되는 두번째 경험에 대하여는 민수기 20장 1-13절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말하도록 모세에게 지시하셨으나, 그는 자기 뜻대로 바위를 쳤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모세는 모형을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을수 있기 때문이다(롬 6:9-10/히 9:26-28 참조). 성령은 단번에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두번째 축복들“과 성령의 “세례(침례)“를 구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범한 것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새로 못박는 것이며 이 죄는 모세로 하여금 축복의 장소 밖에 머물게 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이스라엘이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에서 마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려침을 받은 반석이 광야를 통과할 때 유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더러 있으나 이 설명이 바른 것 같지는 않다. “저희“(them)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전에는 없는 것으로, 이 문장은 그들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는데 이 일은 만나를 주신 다음의 일이라는 뜻이다(10:3/출 16:1-)."


출 17:8-16  

2. 대적과의 싸움(17:8-16)


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전쟁인 것에 놀란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싸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었다(13:17).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적을 정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통하여 싸우신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자손들로서(창 36:12/창 36:16) 육신으로 인한 방해를 보여 준다(창 25:29-34).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단번에 세상(애굽)에서 구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실 때까지 언제나 육과 싸울 것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이 주어진 후에 아말렉족속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갈 5:17).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의 본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죄악된 본성이므로 대립이나 대결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계속 싸우게 된다. 신명기 25장 17-19절은 아말렉이 “비열하게 공격“했고 뒷편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부지중에 다가온다.


이스라엘은 적을 어떻게 이겼는가? 그들에게는 산에 중재자가 있었고 골짜기에 사령관이 있었다! 산 위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보여주며, 검을 가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보여 준다(히 4:12/엡 6:17-18).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에 대한 불완전한 모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시며 조력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기 때문이다(히 4:16/히 9:24). 바울은 신자들이 “기도로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고후 1:11). 아론과 훌이 한 것도 바로 이 일이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말한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적을 무찔렀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큰 승리로 세상을 이기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 데 있어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로마서 6장은 간주하는 것과 순복하는 것,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 혼자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역시혼자서는 전쟁터에서 승전할 수 없었다. 승리는 둘 다를 요구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고(롬 8:34), 우리를 위하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며(롬 8:26), 그리고 손에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그는 그들을 파했을 뿐이다(13절). 이 생애 중에는 육을 멸하거나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우리에게 새 몸을 주실 것이다(빌 3:21). 육을 완전히 섬멸시키겠다는 약속은 14절에 나온다. 사무엘상 15장을 조사해 보면 사울의 죄는 아말렉을 끝까지 처치하기를 거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장 6-10절은 그를 죽인 사람이 그가 살려 두었던 아말렉 사람 중의 하나였음을 알려 준다. “육을 위해서는 대비를 하지 말자!“


“여호와닛시“(Jehovah-Nissi)는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이란 뜻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요 16:33/요일 2:13-14/요일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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